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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KSD갤러리 초대작가전

빈우혁
<Flat-Hunting (플랫 헌팅)>

2019. 12. 5. (THU) - 2020. 1. 29. (WED)



1. 대략 2015년도부터 매번 비슷한 패턴을 경험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그림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것을 그린 이유와 목적 등을 열거할 때 지난한 개인사를 덧붙이는게 자연스럽게 소거되기 시작했던 것. 어쩌면 순서가 잘못된 설명이나 이해가 오해를 낳은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왜 숲을 그렸냐고 나에게 물었을 때, 이미 유년기 때부터 숲을 포함한 풍경을 그려왔다는 설명은 생략했다. 환상이나 감상에 빠져있든, 현실에서 더 이상 긍정적인 안락함과 위안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든, 고향인 한국에서는 숲을 그릴 수 없게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독일에서 고향에서 했던 방식대로 풍경을 그리게 되었음을 설명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초 의도의 순수하고 솔직한 ‘풍경처럼 보이는 뭔가를 그리는 이유’는 학술적인 이유와 예상 가능한 객관성 등을 걸머지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공감이 되기도 하고 논리적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대중에게 설명하는 방식과 전문가에게 설명하는 방식을 분리시켜야 했다. 심지어는 내가 그림을 계속 그릴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강력하고 순수한 동기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않도록 억제하게 된 듯하다. 그 동기는 유치하고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2. 풍경이라 일컬어지는 숲과 공원, 혹은 식물이 군락을 형성한 모습을 거주지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래서 적어도 그것을 그리는 동안 고향에서 일어났던 개인적인 문제들이 그림을 그릴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덮어둘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단지 그것이 익숙하고 거부감이 덜한 자연의 범주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재현하는 것 또한 스스로에게, 그리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설명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자연의 모습’이라는 익숙하고 안정적인 개념을 통해 어쨌든 스스로의 문제와 사회적인 상황을 마주하며 얻게 된 부정적인 결과를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회복이나 치유의 모양새로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3. 한국에 돌아와서도 독일의 풍경이나 장면을 그리는 것은 지난 날 좋았던 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것과 관련된 어떤 것이라도 흔적으로 남겨두길 바래서였던 것은 아닐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내일 또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는 게 나에겐 익숙하다. 만약 오늘 보았던 것을 내일 또 보려면 이미 그 전부터 오늘 보았던 것을 간절히 바라고 그렸어야 한다.
이를테면, ‘시야에 들어오는 숲의 개념’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러한 장소에 이동하는 행위가 선행되어야한다. 이 단계가 의미 있는 이유는, 내가 그리는 일련의 것들은 현실의 장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익숙한 이라 할지라도 나 스스로가 해당 장소를 반복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다면 그림으로 그려지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인적이 드문 숲이나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이 익숙해지면 풍광을 관조하는 시간동안 그것을 그리려는 의도나 본능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어떤 생각들로 가득하게 된다. 그 후, 그러한 잔상들을 연필이나 목탄으로 이어서 그리거나 다시 색을 쌓아올리는 페인팅을 하면서 다시 이러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의 루틴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하는 그럴싸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접근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니까. 일의 숲이 아니라면 그릴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려왔던 것들의 이유를 솔직하게 설명해도 간혹 납득하지 못하는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러면 돈을 벌면 되지 않는가,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누군가 반문하는 순간부터 대화는 단절되곤했다. 그래서 유년시절의 넋두리 같은 일화나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그 상황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이질감 덩어리의 논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듯하다. 숲은 숲이고 그림은 그림이라 냉정하게 보면 이러한 숲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며.

4. 최초 풍경 연작을 시작했을 때 썼던 작가노트에도 숲에 대한 특별한 서사나 감정은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인적이 드물었으면 좋겠고, 집에서 몇 걸음 나가지 않아도 울창하고 넓은 숲이나 강이 있지만 도시나 문명에 서 벗어나지 않은 곳에서 머물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다만 적어도 나에게 그곳이 고향이 아니었을 뿐. 하루에도 서 너 시간 산책과 소요를 하면 매번 눈에 담는 것이 공원과 숲이 갖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지라 집에 돌아와 그것을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면 마치 숲에 강한 의미를 두고 있는 듯한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유감스럽게도 단순히 독일의 숲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뭉뚱그려서 마음의 위로와 안녕을 얻는다고 언명하게 된 적있지만, 궁극적으로 고향에 대한 긍정적인 –그리기를 촉발시키는– 감정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 내게 삶은 삶대로, 작업은 작업대로 분리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기에는 아직도 그냥 받아들이기 불편한 부분이 있다. 한국의 풍경은 2012년도에 그렸던 ‘월정사’를 끝으로 나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5. 잠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실체는 있지만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대리석 벽의 문양과 질감, 색을 마주할 때의 느낌 혹은 독일의 거주자 신고를 위해 관청으로 언젠가 돌아가고자 하는 유치한 마음으로 시작한 드로잉이 오히려 그동안 별로 내켜 하지않았던 불분명한 형태의 그림들을 기약 없이 계속 그릴 수 있게 하였다. 풍경을 그렸던 과정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그것이 독일의 풍경이든 한국의 풍경이든 그림으로 그려진 뒤에는 누군가의 의견처럼 장소가 중요하지 않겠지만, 근본적으로 독일에서 마주한 ‘이상으로 생각했던 현실’이 없었다면 그리려는 의지조차 갖지 않았을 거라고 느낀다. 나는 반복적으로 독일 풍경과 독일에서 실제로 본 어떤 단면들을 그리면서 내가 살았던 세계가 달라지길 바라고 있기도 하다. 앞서 얘기했듯이 달라지기 바란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동시에 갖도록 하기 때문에 그림들은 유언 혹은 배설된 원망의 흔적처럼 이상과 현실의 쉼 없는 갈등으로 들끓고, 그러면서 견고하게 계속 쌓일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준다.

- 빈우혁 작가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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